YOG 15⁺ 지원자 (팬데믹 전 매치)
안녕하십니까
올해 초, 칸 선생님이 신년 안부를 물어오며 컨설팅 사업화 추진의 소식을 알려왔다. 그로부터 추천서 작성을 요청 받았을 때에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망설였다. 첫 번째는 과연 팬데믹 이전의 매치 경험이 지금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까 하는 점이었다. 두 번째는 문화적 차이와 관련된 문제이다. 칸 선생님과의 수업을 돌이켜봤을 때, 한국식 빨리빨리 관점에서는 진행 방식이 많이 낯설었던 것이 떠올랐다. 그는 당장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했다. 내 입장에선 검토를 맡긴 문서들에 대한 결과가 바로 보이지 않아 처음엔 답답했다. 그러나 친한 동료교수의 후배가 추천해 그를 알게 됐고 그때 나 자신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일단 신뢰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. 이런 부분을 내가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하여 글의 방향을 고민하였지만 얼마 전 보드를 취득한 입장으로서 나의 올챙잇적 시절을 기억코자 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하였다. 전달이 늦어진만큼 당시의 자료를 두루 살펴본 뒤 이 추천서를 쓰게 되었다.
첫 상담을 초여름에 했다. 소개 받을 적엔 이곳에 오래 살았다고 하여 그의 한국어 능력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으나 만나서 대화해 보니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. 이후 한 달은 brainstorming을 목적으로 프리토킹을 이어나갔다. 일주일에 평균 두 번 정도 Skype로 만났고, 칸 선생님은 나의 레쥬메와 몇 가지 핵심 키워드를 토대로 질문했다.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던 주제는 ‘왜 의사를 미국에서 해야만 하는지’ 였다. 칸 선생님의 질문과 경청이 반복됐고, 점차 나의 레지던시 지원 의사도 구색과 논리적 타당성을 갖추어 갔다. 가끔은 왜 이런 세부적인 이야기까지 나눠야 하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칸 선생님 덕분에 나의 지난 세월을 전반적으로 회고할 수 있었다. 그런 까닭에 이 Q&A 단계는 내게 매치와 더불어 컨설팅의 가장 값진 성과로 뇌리에 남아있다. 그리고 이때의 칸 선생님과의 심도 깊은 대화는 나중에 인터뷰 대본 준비를 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.
컨설팅을 받기 전 혼자 PS를 작성해뒀다. 칸 선생님은 의사로서의 나와 자연인인 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의 자기소개서를 교정해 주었다. 사실 한 문단 정도를 제외하곤 다 바뀌었다. 부끄럽지만 내 초안은 한국에서의 성취(기초연구, IF가 높은 저널 등등)와 내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들로만 채워졌었다. 이것들은 CV를 통해서 모두 파악할 수 있는 바이다. 칸 선생님이 누누이 강조한 대로 올드 YOG의 자기소개서에는 반드시 ‘왜 미국에’, ‘왜 그 나이에’, ‘왜 이 스페셜티에’ 대한 답들이 서로 잘 맞물려진 채로 드러나야 했다. 그는 내 여러 이야기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여 매끄럽게 스토리를 잘 짜주었다. 그리고 미국적 가치관에 대한 내 이해를 보이기 위해 어떤 경험은 창의적으로 해석해내기도 하였다. 함께 작업한 최종 본을 ERAS에 올리고 나니 정말로 나를 뽑고 싶어하지 않을까 기대가 생겼다. 칸 선생님의 노력으로 다른 문서들 역시 접수 시작과 거의 동시에 제출했다.
예정대로 9월 초부터 바로 인터뷰 준비에 착수했다. 아이디어 발상을 미리 해뒀던 것이 빛을 발했다. self-introduction을 비롯하여 기본 질문들은 속히 끝낼 수 있었고, behavioral question과 연식 있는 지원자들에게만 물어볼 법한 질문들(리더십, 논쟁 해결 방법 등등이 떠오른다)에 집중했다. 이때 온라인 네이티브 튜터들과 몇 차례 따로 연습해봤다. 하지만 칸 선생님과 대본 작업을 끝내기 전까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. 지금은 나아졌지만 그때의 나는 스피킹을 특히 어려워했다. 칸 선생님은 나의 영어 회화 레벨, 내가 지원자로서 보여야 하는 전문성, 미국의 문화적 특성 모두를 고려하여 답변을 바꾸었다. 든든한 조력자가 있음에 감사했다.
그러나 10월이 되어서도 별 소식이 없었다. 희망을 잃을 법한 상황에서도 칸 선생님의 적절하고 지속적인 격려 덕분에 대본 작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. 대본이 완성되어가는 즈음에 모의 인터뷰를 시작했던 것 같다. 칸 선생님은 처음엔 준비했던 질문을 그대로 물어봤다. 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똑같은 질문도 다른 방식으로 묻거나, 일부러 작업한 적 없는 질문을 던지거나, 내가 답변하는 와중에 말을 자르고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모의 인터뷰를 진행해 현장감을 더했다. 이러한 칸 선생님의 노력은 나에게도 오기가 생기게 했고, 자다가도 답변할 수 있을 정도로 대본을 완벽하게 암기하게 만들었다. 그러자 다시 자신감이 생겼다.
추수감사절 직전에 첫 in-person 인터뷰가 잡혔고 이어 1월 중순까지 매주 한 개 꼴로 invitation이 왔다. 이때부터 칸 선생님과 연락은 일상이 되었다. 칸 선생님은 나의 예상 이동 경로를 계산하여 가장 효율적인 방문 일정을 제안해주었다. 그리고 각 프로그램의 공식 사이트에서 특이사항을 검색해 오는 것은 물론, 웹상에 공개된 프로그램 디렉터와 스탭의 정보를 토대로 분위기를 파악해왔다. 오전에 인터뷰가 잡혀있으면 그 전날 밤이나 당일 이른 아침에 약속을 잡아 마지막 점검을 함께 했다. 솔직이 그 때까지 나는 땡큐 레터 같은 관례를 모르고 있었는데 칸 선생님과 같이 그런 이메일부터 letter of intent까지 빠짐 없이 보냈다. 지원 서류와 인터뷰 대본 작업만큼이나 이러한 세심한 배려 때문에 나는 칸 선생님이 매치 전 과정에서 대체 불가능한 조력자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.
나는 IMG가 많은 지역에 탑 초이스로 매치 되었다. 도착 이후 병원 안팎으로 온갖 고생을 다 겪었으나 어느덧 미국에서 새내기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다. 한국을 떠나며 잃은 것도 있지만 분명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도 여럿 있다. 어렵게 정착한 타지인 만큼 늘 감사한 마음가짐으로 살고자 한다. 끝으로, 내 매치의 8할, 그 이상이 칸 선생님과 보낸 시간 덕분이라는 사실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. 미국 레지던시에 관심 있는 사람, 특히 올드 YOG라면 칸 선생님과 함께 도전하기를 자신있게 권하며 좋은 결실을 거두실 것으로 확신합니다.